2016년

[스크랩]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아버지를 떠 올리다

newgopjh75 2016. 8. 7. 12:50

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고  아버지를 떠 올리다. 

/ 茶香조규옥


온다는 비는 오지 않고 날씨는 푹푹 찌는 날. 지인들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반갑게 만나 냉면 한 그릇을 후딱 먹어치우고 느긋하게 커피 한 잔씩을 마시며 쌓인 정담을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더워도 너무 덥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몇 해 전에 더 더웠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영화 한 편 보자는 제안에 우르르 식당 문을 나섰다.    극장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방학을 맞아 학생들까지 가세한 탓이다. 사람들 속을 비집고 들어가 상영중인 프로그램을 보여주고 있는 화면을 쳐다본다.


요즘 세태를 적나라하게 표현 했다는 좀비가 나온다는 부산행이 화면이 흐른다. 모두들 시큰둥한 얼굴이다. 우리 세대야 귀신 이야기가 맞지, 월하(月下)의 공동묘지라던가. 그 뒤를 제임스 본이 흐른다. CIA의 인간병기 제임스 본이 그의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가는 영화란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데 인천상륙작전이 흘러나온다. 순간 눈들이 마주 친다. 일제히 이 영화 보자는 눈빛신호를 주고받는다.

우리 나이 대를 전후한 사람들에게 맥아더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아마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대답이 돌아 올 것이다. 그 만큼 우리 세대에게 있어 인천상륙작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6.25의 영웅이라고 일컫는 그는 우리나라를 구한 사람으로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주역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쓰러져간 진정한 영웅들을 몰랐던 탓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본다는데 제 아무리 좀비가 나오는 영화가 관객 천만을 향 해 달린다지만 인천상륙작전에게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영화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불과 사흘 만에 서울 함락,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된 대한민국. 국제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리암 니슨 분)는 연합군 모두의 반대 속에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낙동강으로 가는 북한군 보급로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문득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이 생각났다. 그 당시 이순신 장군도 바닷길을 끊어 일본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전쟁물자가 왜군에게 보급되지 못하게 해야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은 들어맞아 임진왜란은 막을 내린다. 영웅들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디가 달라도 다른 모양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 5000:1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단 하나, 인천으로 가는 길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뿐이다. 그 길을 뚫기 위해 특수부대인 켈로 부대가 일명 ‘X-Ray' 작전에 돌입한다.


이것을 북한군도 첩보를 입수하고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설마 인천항은 7~10미터에 달하는 간만의 차가 있고 만약 이 시간 안에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면 물높이가 낮아지므로 큰 군함들은 갯벌에 걸려서 오히려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 곳으로 오랴 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모르니 인천항에 기뢰를 설치하고 해안에 포를 설치하고 지뢰를 설치했다.   


여기에 ‘X-Ray' 작전 팀이 투입 된다. 대한민국 해군 특수부대 장학수(이정재 분) 대위가 7인의 부하를 이끌고 팀을 이끈다. 그는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공부한 공산주의자였으나 아버지를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하는데 제일 친한 친구가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보고 대한민국 특수부대를 지원하여 팀을 맡게 된다.


그는 첩보부대를 이끌고 적지인 인천에 북한군으로 위장하고 침투하여 30여 명의 섬 주민 반공청년대와 함께 인천항 정보 수집을 시작하며 작전을 착착 진행 시켜 나갔다.    그들에게도 지켜야 하는 어머니가 있었고 처자식이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작전을 앞두고 죽음을 예견했었는지 그들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장사하는 어머니를 숨어서 이별을 고하는 장학수 대위. 하늘에서도 어머니를 지켜주겠다는 그의 마음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 온다. 막내아들을 품에 처음으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꼭 살아오겠다는 다짐을 아내에게 전하는 남편도 아버지도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가슴 아픈 흔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 첩보활동을 마치고 돌아서던 그들은 뜻밖의 상황에 아연실색 한다. 북한군은 인천 해안 바다 속에 기뢰를 설치하고 해안가에 대포를 대기시키고 지뢰를 해안가 곳곳에 묻고는 우리 군이 상륙할 때를 기다리는 북한군을 만난 것이다.


작전 중에 전우들을 잃고 남은, 겨우 서 너 명이 해안을 방어하려 대기 한 북한군 1개 대대를 초토화 시키고 월미도 등대에 불을 켰다. 신호다. 상륙작전을 실시하라는. 그리고 그들은 죽어 갔다.   


 때 아닌 태풍까지 만났던 연합군은 큰 무리 없이 인천상륙 작전을 실시했다. 새벽 6시 30분에 인천상륙작전의 첫 번째 상륙부대가 상륙했다. 한국해병대 중대와 미국해병대 대대는 인천 앞의 월미도를 점령하였다.


오후 5시 30분에는 2차 상륙이 시도되었다. 이 공격에서 인천의 북부와 남부를 동시에 공격하여 점령했다. 대승이었다.    유년시절에는 몰랐다. 그저 연합군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우리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생각 했다.


물론 그들의 도움 없이는 오늘의 우리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나라를 위해 죽어 간 수 많은 젊은이들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혹한 전쟁에 뛰어 들었던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   


그 젊은이 중에는 나의 아버지도 계신다. 지금은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가 예순을 넘었을 무렵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6.25 전쟁 무공훈장 대상자라고 훈장을 받아 가라는 연락이다. 우리 남매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아버지가 무공훈장을 받을 만 큼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묵묵히 언제나 최선을 다 하시는 아버지였다. 자식들을 위해 단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사셨다. 법 없어도 사실 수 있는 그런 아버지가 무공훈장 대상자라니.   


사연은 이랬다. 한 겨울,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아버지는 대관령에서 싸우고 계셨다. 대관령의 1월은 폭설과 혹한은 평상시에도 견디기 힘든 곳이다. 눈은 허리까지 왔는데 아버지 부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 되었다고 한다. 날만 새면 전투는 벌어지고 무전기까지 고장 나 부대 상황을 대대에 전달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 꼼짝없이 전멸하게 생겼을 때 아버지는 부대를 떠나 북한군을 뚫고 부대가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리러 연락병을 자원 해 떠났다고 한다. 작전은 성공 했고 아버지 부대는 북한군의 포위 상황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 공로로 무공훈장을 나왔었는데 지금에서야 주인을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그 대관령 전투 덕분에 아버진 한 쪽 귀의 청각을 거의 잃으셨다. 늘 잘 들리지 않아 답답하게 한 평생을 사셨다. 그렇다고 무슨 상이군인의 혜택을 받은 적도 없다. 그 당시 전쟁이 가져 온 혼란으로 기록이 사라진 것이었다. 내 기억하는 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기록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시다. 그저 묵묵히 우리 남매들을 위해 일생을 사셨다.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그런 아버지가 영웅이시다.   


그런 영웅들이 어디 우리 아버지뿐이겠는가. 이 땅에 많은 아버지나 아들들이 그런 삶을 사셨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삶을 성실히 살아가신다. 그런 분들에게 이제 국가가 작은 성의를 베풀어야하지 않을까. 전쟁 후에야 나라가 가난했으니 대우를 해 주지 못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남아있는 6.25 참전 용사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좀 더 윤택 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공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우리의 국력은 그 것을 할 수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오는 실존 인물인 임병례 해군중위, 홍시욱 해군하사, 그리고 7인의 첩보대원과 의용대원 30여명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고 죽음을 예견했었는지 그들은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장사하는 어머니를 숨어서 이별을 고하는 장학수 대위. 하늘에서도 어머니를 지켜주겠다는 그의 마음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 온다. 막내아들을 품에 처음으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꼭 살아오겠다는 다짐을 아내에게 전하는 남편도 아버지도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가슴 아픈 흔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전 첩보활동을 마치고 돌아서던 그들은 뜻밖의 상황에 아연실색 한다. 북한군은 인천 해안 바다 속에 기뢰를 설치하고 해안가에 대포를 대기시키고 지뢰를 해안가 곳곳에 묻고는 우리 군이 상륙할 때를 기다리는 북한군을 만난 것이다. 작전 중에 전우들을 잃고 남은, 겨우 서 너 명이 해안을 방어하려 대기 한 북한군 1개 대대를 초토화 시키고 월미도 등대에 불을 켰다. 신호다.


상륙작전을 실시하라는. 그리고 그들은 죽어 갔다.    때 아닌 태풍까지 만났던 연합군은 큰 무리 없이 인천상륙 작전을 실시했다. 새벽 6시 30분에 인천상륙작전의 첫 번째 상륙부대가 상륙했다. 한국해병대 중대와 미국해병대 대대는 인천 앞의 월미도를 점령하였다. 오후 5시 30분에는 2차 상륙이 시도되었다.


이 공격에서 인천의 북부와 남부를 동시에 공격하여 점령했다. 대승이었다.    유년시절에는 몰랐다. 그저 연합군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하여 풍전등화 같았던 우리나라를 구한 영웅이라고 생각 했다. 물론 그들의 도움 없이는 오늘의 우리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나라를 위해 죽어 간 수 많은 젊은이들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혹한 전쟁에 뛰어 들었던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다.   


그 젊은이 중에는 나의 아버지도 계신다. 지금은 국립묘지에 잠들어 계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가 예순을 넘었을 무렵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6.25 전쟁 무공훈장 대상자라고 훈장을 받아 가라는 연락이다. 우리 남매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 아버지가 무공훈장을 받을 만 큼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묵묵히 언제나 최선을 다 하시는 아버지였다. 자식들을 위해 단 한 번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사셨다. 법 없어도 사실 수 있는 그런 아버지가 무공훈장 대상자라니.    사연은 이랬다. 한 겨울,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아버지는 대관령에서 싸우고 계셨다. 대관령의 1월은 폭설과 혹한은 평상시에도 견디기 힘든 곳이다.


눈은 허리까지 왔는데 아버지 부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 되었다고 한다. 날만 새면 전투는 벌어지고 무전기까지 고장 나 부대 상황을 대대에 전달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꼼짝없이 전멸하게 생겼을 때 아버지는 부대를 떠나 북한군을 뚫고 부대가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리러 연락병을 자원 해 떠났다고 한다. 작전은 성공 했고 아버지 부대는 북한군의 포위 상황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 공로로 무공훈장을 나왔었는데 지금에서야 주인을 찾았다는 연락이었다.   


그 대관령 전투 덕분에 아버진 한 쪽 귀의 청각을 거의 잃으셨다. 늘 잘 들리지 않아 답답하게 한 평생을 사셨다. 그렇다고 무슨 상이군인의 혜택을 받은 적도 없다. 그 당시 전쟁이 가져 온 혼란으로 기록이 사라진 것이었다. 내 기억하는 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기록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으시다.


그저 묵묵히 우리 남매들을 위해 일생을 사셨다.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그런 아버지가 영웅이시다.    그런 영웅들이 어디 우리 아버지뿐이겠는가. 이 땅에 많은 아버지나 아들들이 그런 삶을 사셨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삶을 성실히 살아가신다. 그런 분들에게 이제 국가가 작은 성의를 베풀어야하지 않을까. 전쟁 후에야 나라가 가난했으니 대우를 해 주지 못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남아있는 6.25 참전 용사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삶이 좀 더 윤택 할 수 있도록 그들의 공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이제는 우리의 국력은 그 것을 할 수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영화에 나오는 실존 인물인 임병례 해군중위, 홍시욱 해군하사, 그리고 7인의 첩보대원과 의용대원 30여명에게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출처 : 육군3사관학교를 사랑하는 분들의 모임
글쓴이 : 한우리에9이철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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