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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바야흐로 진급의 계절이다. 진급자의 전화기는 하루 종일 통화 중이다. 비선자의 사무실은 적막만이 감돈다. 무슨 말로 비선자를 위로할 수 있으랴 ! 단언컨대 세계 각국의 사전을 모조리 뒤져도 비선자를 위로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그럼에도 비선자를 위로하는 글을 쓰는 만용을 부려본다. 비선자를 위로하는 기고문을 본 적이 없기에….
인생 전부를 놓고 보면 군생활은 사실상 예선전일 뿐이다. 이제부터의 사회생활이 결승전이다. 마르고 닳도록 군생활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늘의 진급자도 내일은 군을 떠나 제2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 더구나 수명은 길어지고 정년은 상대적으로 짧은 군의 간부들에게 또 하나의 사회생활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렇다면 기왕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회생활을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일 수도 있다. 예선전 군생활에서 동메달을 딴 간부들이 결승전 사회생활에서 금메달을 따고 환호하는 사례가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기에….
‘마누라는 양보해도 진급은 양보할 수 없다’는 농담이 있다. 그만큼 군에서의 진급은 ‘All or Nothing’ 의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그렇고 보니 오늘의 내 계급장도 동료들의 희생과 눈물을 먹으며 여기까지 왔다. 계급이 높을수록 동료들의 희생도 기하급수로 늘어난다. 이번에는 내가 동료들을 위해 희생 플라이를 날렸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마음은 쓸쓸하지만 그동안 진 빚을 갚는 거라 생각하면 조금은 후련하지 않은가.
연극에서 배우의 퇴장은 오직 연출자의 시나리오에 달렸다. 어떤 배우가 1막을 마치고 퇴장할지, 3막까지 남아 있을지는 연출자만이 안다. 모든 배우가 끝까지 살아남는 연극은 없다. 왜 나는 2막에서 퇴장해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배우도 없다.
우리에게 연출자는 누구인가? 각자가 믿는 신앙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신앙이든, 운명이든, 이것을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해서도 안 된다. 어차피 떠날 수밖에 없는 무대라면 웃으면서 무대를 내려오는 것이 아름답지 않을는지….
눈을 들어보면 준비된 군 출신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다. 최근의 경제불황으로 재취업이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고 충성심이 강한 군 간부출신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많다. 실제로 군 관련 분야는 물론, 민간 분야에서도 다수의 군 출신이 성공적인 결승전을 치르고 있지 않는가?
어느 등산가가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 천신만고 끝에 칡덩굴을 잡고 매달렸다. 그러나 힘이 점점 빠지자 결국 칡덩굴을 놓아 버렸고,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떠 보니 아무 탈 없이 땅 위에 서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땅 위 1m에서 칡덩굴을 잡고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칡덩굴을 놓기만 하면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그 줄을 놓는 순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군문을 나서면 사막만 있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사막에도 여기저기에 오아시스가 있고, 그 오아시스는 찾아나서는 자의 것이다. 이 글을 읽은 후 술잔을 내던지고 용감하게 오아시스를 찾아나선 비선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아무래도 필자의 무리한 욕심 같기도 하고….
<3사 11기 이정호 재향군인회 편집부장 jungho511842@hanmail.net> |
출처 : 육군 3사관학교를 사랑하는 분들의 모임
메모 : 2008.09.30. 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