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스크랩] 탈북 여군 출신 이소연 씨가 본 남과 북 (1-5)

newgopjh75 2012. 11. 8. 23:14
출처 : 육군 3사관학교를 사랑하는 분들의 모임
글쓴이 : 한우리에9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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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대신 낫 들고 낮엔 농사일 밤엔 훈련 ‘살아남기 안간힘’
탈북 여군 출신 이소연 씨가 본 남과 북 / 2012.07.20

통일부에 따르면 올 3월까지 우리나라로 입국한 탈북자는 2만3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1998년 이전까지 탈북자 수를 모두 합해도 900여 명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폭발적인 증가다. 다양한 이력의 탈북자도 많아졌는데 북한 여군 출신 탈북자 이소연(36·사진)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20일 오전 8시 처음 방송되는 국군방송TV ‘KOREA 리포트’에 출연, 이씨가 증언한 북한의 실상과 남한 생활의 소회를 5회에 걸쳐 싣는다.


게재 순서
① 북한 여군의 생활
② 험난한 남한으로의 여정
③ 충격! 남한 사회·군대(상)
④ 충격! 남한 사회·군대(하)
⑤ 불효녀에서 효녀 심청으로

 나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다. 아버지가 대학교수여서 나름대로 살 만한 편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식량난을 겪었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들어서면서 먹고살기가 어렵자 입 하나라도 덜자는 생각에 입대를 결심했다. ‘생계형’ 입대인 셈이다.

 또 다른 동기도 있었다. 당시 압록강을 경계로 중국과 마주 보는 ‘자강도’란 지역에서 정춘실이라는 여군 간부가 김정일을 유일하게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 있게 돼 유명세를 치렀다. 그녀는 주민들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자 감자 농사를 짓고 ‘해리서’ (뉴트리아의 북한말) 가죽을 벗겨 중국에 판매, 자력갱생의 본보기를 보여 북한 사회에서는 이 여성을 본받자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나도 ‘정춘실처럼 돼서 고향을 빛내겠다’는 생각에 1992년 만 16살에 입대를 결심했다.

 하지만, 군 생활은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입대 후 처음 만난 여군 선배는 총 대신 낫을 들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봤던 깔끔한 군복 차림의 멋진 여군은 없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농사짓고 땔감을 구해야 했다.

정신교육은 주 8시간으로 철저하게 받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부대 유지를 위한 작업과 농사로 보냈다. 통신 관련 임무를 맡았는데 검열이 시도 때도 없이 이뤄져 낮에는 농사일, 밤에는 훈련을 해야 했다.

 그래도 군 생활에 잘 적응한 편이었다. 입대 4년 만에 상사로 진급할 정도였으니까. 진급은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윗 계급에 공석이 생기면 빠지는 순서대로 올라가는 시스템이다.

 북한군 내에서는 임무나 대우 면에서 남녀 차이가 거의 없다. 96년부터 여군 용품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여군들이 대거 입대했다. 실망스러웠지만 10년간 무난히 군 생활을 마치고 상사로 전역,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인생을 바꿀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됐다.

 


② 험난한 남한으로의 여정
어려운 생활에 지쳐 남한 드라마 보며 탈북 결심


제대 후 집으로 왔지만, 식량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온종일 장터에서 일해도 하루 먹을거리를 구하기도 어려운 생활에 지쳐갈 무렵 우연히 남한 드라마를 봤다. 이병헌·송혜교 씨가 출연한 ‘올인’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고난의 행군 이후 브로커가 생기면서 남한 드라마가 북한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미국·러시아 영화와 달리 남한 드라마는 재밌는 데다 자막이 필요 없어 인기였다. ‘올인’ 이후 많은 남한 드라마를 보며 탈북을 결심했고 2006년 11월 마침내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건넜다. 부모님께는 차마 알릴 수 없었다.

 당시 기온이 영하 20~30도였는데 옷이 젖으면 안 돼 속옷 차림으로 강을 건넜다. 물이 어찌나 찬지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당원에 군 출신이었기 때문에 잡히면 더욱 가혹하게 문책당한다는 두려움에 아픔도,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강에서 나오니 강바닥 돌이 얼음처럼 발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안도한 것도 잠시, 몇 개월 만에 이웃의 신고로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북송됐다. 보통 북송되면 도의부나 경찰서로 가는데 나는 군으로 끌려갔다. 1㎡도 안 되는 깜깜한 공간에서 13일간 7끼를 먹으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러다 노동단련대에서 6개월을 보냈다. 대부분 탈북자로 이뤄진 60~70명 규모의 노동단련대에는 ‘사흘 만에 콘크리트 다리를 세우라’라는 등의 터무니 없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했다.

그 후 다시 시작된 감옥생활. 소금 국에 형편없는 밥을 주며 구둣발로 얼굴을 찍고 임신부를 철봉에 매달아 때리는 등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행위들이 계속됐다.

 이때 어머니가 큰 힘이 됐다. 이전에 오빠가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감옥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날 살리는 데 필사적이셨다. 전 재산을 팔아 관계자들에게 내 부탁을 했고 그 덕분에 살아나올 수 있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남한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이번엔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고 아버지는 ‘그래, 여기서 못 사니까.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꼭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두만강을 다시 건넜고 이번에는 무사히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눈앞에 펼쳐진 남한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 관련 내용은 23일 오전 9시 재방송되는 국방TV의 주간 정책 이슈 프로그램 ‘코리아 리포트’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3. 낯설고도… 신기한… 남한 생활 적응 과정 중 가장 힘든 것은 ‘말투’
탈북 여군 출신 이소연 씨가 본 남과 북 / 2012.07.24

일자리 면접보면 ‘조선족’ 취급하며 써주지 않아 잘살려고 탈북했기에… 첫 1년 반 동안은 일만 해

게재 순서
① 북한 여군의 생활
② 험난한 남한으로의 여정
③ 충격! 남한 사회·군대(상)
④ 충격! 남한 사회·군대(하)
⑤ 불효녀에서 효녀 심청으로

 남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내게는 모든 것이 충격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인데 처음에는 가게에 붙은 ‘폭탄세일’이라는 말에 너무 놀랐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가게에서 폭탄을 팔다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정주부들 모습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밥할 때 쌀을 설렁설렁 씻는 모습이었다. 북한에서는 쌀에 돌이 많아 그렇게 쌀을 씻었다간 밥 먹다 돌을 씹어 치아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밥 먹다 돌이 몇 번 나오면 남편들이 밥상을 엎어버리는 일도 종종 있는데 남한에서는 쌀을 박박 씻으면 영양소가 씻겨나간다며 살살 씻으니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 다른 생활방식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길거리에 차가 너무 많은 것 역시 놀라웠다. 북한에는 개인 차량, 즉 자가용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 아버지도 대학교수였지만 차가 없었다. 차를 몰고 다니는 화교 주민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 차도 개인자산은 아니다. 자가용을 소유하는 경우는 국가적 공을 세운 공화국 영웅이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계순희 선수처럼 유명 스포츠 선수에게 김정일이나 국가가 차를 하사할 때가 전부였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한 내가 남한 생활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말투였다. 함경도 사투리는 투박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면접을 봐도 내 말투를 듣고 ‘조선족 아니냐’며 써주지 않았다.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이런 말을 들어도 차마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

 그래도 잘살아 보려고 탈북했기 때문에 어렵사리 일을 구해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세 가지나 했다. 첫 아르바이트에서 3시간 일해 1만5000원을 받았는데 너무 행복했다. 남한 기준으로 소액일지 몰라도 우리 아버지의 월급이 북한 돈으로 3800원, 남한 돈으로 환산하면 1200원이지만 고작 3시간 일해 내 손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이 너무 뿌듯했다. 이렇게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남한으로 온 후 첫 1년 반 동안에는 주말·휴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너무 일만 하다 보니 몸이 견뎌내질 못했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라고는 ABC조차 배우지 못한 내게 영어나 생소한 용어가 많이 나오는 학교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60~70대 어르신들도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었고 지금은 어느덧 3학년이 됐다. 휴일에도 쉬지 않고 밤잠을 설쳐가며 번 돈으로 이제는 한류 스타들이 입는 옷을 판매하는 중국인 대상 의류 쇼핑몰까지 창업했다. 가끔 강의도 나간다.

 물론 생활하면서 내가 처음 접했던 드라마 ‘올인’ 속의 남한과 실제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스트레스’가 뭔지도 알게 됐다. 북한에서 봤던 남한 드라마 주인공들이 ‘스트레스받는다’고 얘기할 때 ‘신경질 난다’는 뜻이 아닐까 어림짐작만 했는데 이제는 나도 스트레스를 받는 남한 사람이 됐다. 그래도 난 행복하다. 힘들지언정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4. 한국군, 경기하다가도 상급자만 보면 “충성”
탈북 여군 출신 이소연 씨가 본 남과 북 / 2012.07.25

北, 남한 노래 즐겨 부르는 등 군 기강 해이 잘 먹지 못해 체격 왜소…‘무’가 유일한 반찬

게재 순서
① 북한 여군의 생활
② 험난한 남한으로의 여정
③충격! 남한사회·군대(상)
④ 충격! 남한 사회·군대(하)
⑤ 불효녀에서 효녀 심청으로

북한 여군 출신이라 남한 군대로 안보강연을 가는 일이 더러 있는데 남한 사회뿐만 아니라 군대의 모습도 충격적이었다.

 북한군에 있을 때 남한 군대는 기강이 해이하고 장병들은 노예처럼 억지로 훈련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육군훈련소에서 만난 신병들은 갓 입대했는데도 군기가 너무 잘 잡혀 있어 깜짝 놀랐다.

 한 부대에서 봤던 풍경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휴식시간을 이용해 농구경기를 하던 장병들이 상급자가 지나가자 하던 경기를 멈추고 일제히 경례하는 모습이 너무 반듯해 보였다. 이들을 누가 기강이 해이한 군인이라 하겠는가.

 장병들의 식단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병들의 반찬을 보니 ‘육·해·공’ 반찬이 고루 어우러져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그에 비해 북한군은 유일한 반찬이 소금에 절인 무다. 국 역시 뭇국을 주로 먹고 가끔 된장이 나오면 시래깃국을 끓여 먹는 정도가 전부다.

 남한처럼 비닐하우스 같은 것이 없다 보니 제철이 지나면 음식재료 구하기가 어려워서다. 만날 무만 먹으면 질리니까 네모로 잘라 소금에 절여 먹고 별표로 잘라 고춧가루에 무쳐먹고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 변화를 줘서 먹는다. 김치를 담그기도 하지만 땅에 묻어 보관하기 때문에 기껏해야 한 달 정도밖에 못 먹는다. 또 굶주린 부대원들이 밤에 몰래 김치를 훔쳐 먹는 경우도 많아 더더욱 오랜 기간 김치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수확해 겨울부터 봄까지 보관하며 먹을 수 있는 무가 군 식단의 단골 메뉴가 된 것이다.

 남한 부대의 취사장에서 본 대형 냉장고와 그 안에 꽉 들어찬 음식재료는 내겐 너무 비현실적인 물건이었다. 북한군에서 냉장고는 상급부대에 한 대 정도 있는 것이 전부다. 냉장고 자체도 귀하지만 설령 보급된다 하더라도 전기사정이 좋지 않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대신 전시를 대비해 파놓은 갱도 안이 서늘해서 그곳에 무 같은 음식재료를 보관하곤 했다.

 육·해·공 반찬이 고루 차려진 식사를 매끼 잘 먹어서일까. 장병들의 체격은 얼마나 좋은지. 하나같이 키도 크고 듬직하다. 북한군은 성장기 때 잘 먹지 못해 체격이 왜소하기 그지없다. 북한군이 남한군을 본다면 입 딱 벌리고 당장 도망갈 것이다.

 혹시 TV를 통해 북한군을 보고 북한군이 강하고 기강이 제대로 서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멋진 군복을 입고 행진하던 TV 속 여군들의 모습에 반해 입대를 결심했으니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내가 처음 만난 선배 여군이 낫을 들고 있었듯이 TV 속 북한군의 모습은 실상과 매우 다르다. 북한군에서는 정기적으로 ‘오락회’를 개최한다. 노래나 춤 같은 장기를 선보이는 일종의 장기자랑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런데 1995~96년 무렵부터 입대하는 신병들이 남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워낙 스스럼없이 부르고 노래도 좋아서 처음에는 그것이 남한 노래인 줄도 몰랐다.

 주로 트로트를 불렀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이란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였다. ‘김치’를 ‘담배’ 같은 다른 단어로 바꿔 부르곤 했는데 워낙 재미있어서 나도 열심히 따라 부르곤 했다. 부대 안에서 그렇게 남한 노래를 즐겨 불러도 정치지도원 등 누구도 그것을 막거나 징계하는 것을 못 봤다. 남한 군대에서 장병들이 북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남한 노래를 공식 석상에서도 즐겨 부르는 현상은 북한 군대의 기강이 이미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고 있다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5. “오매불망 부모님, 언젠가는 꼭 모셔올게요”
탈북 여군 출신 이소연 씨가 본 남과 북 <끝> / 2012.07.26

드라마 ‘올인’ 보며 꿈꾸던 판타지 한국 온 지 만 3년

공기처럼 흔해 그 소중함 느끼지 못하는 ‘자유’ 생각하고… 말하고…원하는 곳 갈 수 있는 자유 있어 한국이 좋다

게재 순서
① 북한 여군의 생활
② 험난한 남한으로의 여정
③ 충격! 남한 사회·군대(상)
④ 충격! 남한 사회·군대(하)
⑤ 불효녀에서 효녀 심청으로

 첫 번째 탈북에 실패한 후 두 번째 탈북을 시도하면서 너무 두려웠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또 잡히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더 두려웠던 것은 이번에 또 실패하면 부모님께 정말 불효녀가 될 것이라는 부담감이었다. 나 때문에 부모님께서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탈북한 지 만 3년이 되고 남한 사회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이제 적어도 불효녀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선 나 자신이 행복하게 생활하는 데다 남한에서 번 돈 중 일부를 1년에 두 번 정도 부모님께 송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식 송금체계가 없는 탓에 북한으로 돈을 보내려면 브로커에게 엄청난 수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남한 기준으로 봐서 그리 많지 않은 액수의 돈 덕분에 부모님께서 노후에 안정적으로 생활하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하다. 불효녀에서 조금씩 효녀 심청이 돼 가는 느낌이랄까. 부모님께 늘 죄송하지만, 인편을 통해 연락도 가끔 하기 때문에 한결 안정감을 찾고 있다. 언젠가는 남한으로 부모님을 모셔와야겠다는 꿈을 가슴에 품은 채 산다.

 남한에 와 보니 나를 보호해줄 만한 부모님도 안 계시고 누구의 덕을 볼 수도 없다는 사실에 외롭고 막막했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젠가 통일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부모가 살아 계시니까 언젠가 통일이 되면 고향을 찾아 부모님과 고향 분들께 ‘제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돼 왔습니다’라고 당당히 얘기하고 싶다.

 이런 즐거운 상상을 하며 한국 국민과 장병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러분이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한으로 오면서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남한에서는 공기처럼 흔해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자유’ 말이다.

 탈북자들의 출신 지역을 살펴보면 평안도 등 다른 지역에 비해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맞닿아 있는 함경도가 상대적으로 많다. 다른 지역 주민도 탈북을 원하지만, 북한에는 여행의 자유가 없어 국경 근처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어 한국이 좋다. 굶을 걱정 없는 한국이 좋다. 이처럼 북한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살고 싶어하는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국민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최근 남한 내에서 일고 있는 종북세력 논란은 참 어처구니가 없다. 초등학생도 아니고 북한으로 인해 남한이 그동안 겪은 고통을 다 아는 분들이 북한을 찬양한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장병들에게도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라는 당부를 꼭 하고 싶다. 내가 북한군에 몸담고 있었던 1999년 1차 연평해전이 일어나자 당시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북한이 승리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실제 군인들이 남한군에 대해 가진 공포는 대단했다.

특히 남한 해군의 고속정에는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1분에 수천 발이 발사되는 벌컨포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들 두려움을 느꼈다. 모두들 북한 해군의 경우 포를 한 번 쏘려면 2분 이상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국민들에게 북한 사람들은 다 똑같아 보이겠지만 북한 체제를 잘 들여다보면 독재자들과 권력을 가진 자들만 호의호식하는 반면 주민들은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또 지금 이 시간에도 내가 탈북하는 계기가 됐던 ‘올인’ 같은 남한 드라마들이 북한에서 한류를 이끌고 있다. 이런 주민들의 절박한 노력과 한류가 있기에 통일에 대한 희망도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우리 탈북자들도 많이 노력하고 있으니 대한민국 국민들도 멋진 대한민국을 만들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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