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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면접보면 ‘조선족’ 취급하며 써주지 않아 잘살려고 탈북했기에… 첫 1년 반 동안은 일만 해
게재 순서 ① 북한 여군의 생활 ② 험난한 남한으로의 여정 ③ 충격! 남한 사회·군대(상)
④ 충격! 남한 사회·군대(하) ⑤ 불효녀에서 효녀 심청으로 남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내게는 모든 것이 충격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인데 처음에는 가게에 붙은 ‘폭탄세일’이라는 말에 너무 놀랐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가게에서 폭탄을 팔다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정주부들 모습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밥할 때 쌀을 설렁설렁 씻는 모습이었다. 북한에서는 쌀에 돌이 많아 그렇게 쌀을 씻었다간 밥 먹다 돌을 씹어 치아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밥 먹다 돌이 몇 번 나오면 남편들이 밥상을 엎어버리는 일도 종종 있는데 남한에서는 쌀을 박박 씻으면 영양소가 씻겨나간다며 살살 씻으니 같은 하늘 아래 이렇게 다른 생활방식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길거리에 차가 너무 많은 것 역시 놀라웠다. 북한에는 개인 차량, 즉 자가용을 갖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 아버지도 대학교수였지만 차가 없었다. 차를 몰고 다니는 화교 주민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 차도 개인자산은 아니다. 자가용을 소유하는 경우는 국가적 공을 세운 공화국 영웅이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계순희 선수처럼 유명 스포츠 선수에게 김정일이나 국가가 차를 하사할 때가 전부였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한 내가 남한 생활에 적응해가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말투였다. 함경도 사투리는 투박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구하려고 면접을 봐도 내 말투를 듣고 ‘조선족 아니냐’며 써주지 않았다.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이런 말을 들어도 차마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다. 그래도 잘살아 보려고 탈북했기 때문에 어렵사리 일을 구해 하루에 아르바이트를 세 가지나 했다. 첫 아르바이트에서 3시간 일해 1만5000원을 받았는데 너무 행복했다. 남한 기준으로 소액일지 몰라도 우리 아버지의 월급이 북한 돈으로 3800원, 남한 돈으로 환산하면 1200원이지만 고작 3시간 일해 내 손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이 너무 뿌듯했다. 이렇게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져 남한으로 온 후 첫 1년 반 동안에는 주말·휴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너무 일만 하다 보니 몸이 견뎌내질 못했고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나 자신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라고는 ABC조차 배우지 못한 내게 영어나 생소한 용어가 많이 나오는 학교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하지만, 60~70대 어르신들도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었고 지금은 어느덧 3학년이 됐다. 휴일에도 쉬지 않고 밤잠을 설쳐가며 번 돈으로 이제는 한류 스타들이 입는 옷을 판매하는 중국인 대상 의류 쇼핑몰까지 창업했다. 가끔 강의도 나간다. 물론 생활하면서 내가 처음 접했던 드라마 ‘올인’ 속의 남한과 실제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스트레스’가 뭔지도 알게 됐다. 북한에서 봤던 남한 드라마 주인공들이 ‘스트레스받는다’고 얘기할 때 ‘신경질 난다’는 뜻이 아닐까 어림짐작만 했는데 이제는 나도 스트레스를 받는 남한 사람이 됐다. 그래도 난 행복하다. 힘들지언정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