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대 천주교 신자들이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
정약전·정약종·정약용·윤지충 등
이벽이 강론을 하고 있다.
그는 왜 국가 전복을 음모했을까.
17세기 후반 성리학의 지배체제가
무너지던 시기였고.
정조는 거중기를 사용 화성을 건축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실용학문 수학, 과학기술을 배우던 시절
선교사들이 자문 역할을 했다.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천주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생겨났다.
황사영은 정약종·정약용의 지도로
천주교 교리 연구에 매진했다.
그가 비밀문서를 작성했던 배론성지는
배 밑바닥 모양을 닮았다.
1801년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숨어서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주민들은 그를 피신시키기 위해 지하실
위 옹기그릇으로 덮었다.
그는 밀사를 보내 바깥 상황을 알아보고,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주문모 신부가 새남터에서 참수됐다는 것
그가 세례를 받았던 분이다.
격분한 그는 천주교 박해 상황과
해결책을 담은 비밀문서를 작성했다.
등잔불에 의지 길이 62㎝, 너비 38㎝의
명주에다 1만3384자를 썼다.
저고리에 감춘 뒤 프랑스인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계획이었으나
밀사가 체포됐고, 황사영도 백서와
함께 땅굴 속에서 잡혔다.
군함 수백 척, 정병 5만~6만 명 대포 등
무기를 싣고 해안가에 와서
국왕에게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조정은 황사영에게 대역죄를 선고
능지처참에 처했다.
황사영에게 福者 칭호를 추진했지만
시복식 대상 124명에는 빠졌는데.
무력에 의한 조선 지배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남양주시에는 정약종의 업적을 기리는
마재성지가 있고
그는 1801년 반대파의 밀고로
처형당했다.
처형장에서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라고 외쳤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왕위에 오른 1801년
신유박해 때 100여 명이 처형당했다.
시복자 124명 중 신유박해 때 순교자는
53명으로 가장 많았다.
'사람을 사랑하라, 인간은 존엄하다’는
교리를 실천했다.
양반과 상놈 신분제를 부정한 신자들
탄압 수위를 올렸다.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 (1801년, 순조1년)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체제에 반발,
정조의 관대한 정책으로 교세가 확대
순조의 섭정 정순대비 금아령을 내림
정약종을 비롯 5명 참수.
주문모 신부를 비롯 100명이 처형
400명이 유배.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
안동 김씨 세도를 뺏앗기 위해
풍양 조씨가 일으킨 정치적 갈등
참수 70명, 60여 명 옥사.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 순교 참수.
*병오박해 (1846년 헌종 12년)
김대건 신부 체포 새남터에서 순교
성직자1, 평신도 8 명 1984년 시성
*병인박해(1866~1873년 고종 3년)
1866년-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까지
병인양요 박해로 8천명~ 1만 명 순교
무명 순교자 24인 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