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스크랩] 이조시대 28공신과 종계변무란

newgopjh75 2014. 6. 18. 02:41

이들 공신 중 원종공신을 제외한 정(正)공신을 연대, 공적, 등급별 인원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 표는 뒤에 훈적이 삭제 된 것임

공신호칭

연  대

공 적 약 기

인 원 수

서기 년

1등

2등

3등

4등

 개국(開國)

 태조 원년

 조선개국

12

13

22

 

1392

 정사(定社)

 정종 즉위년

 방석, 정도전, 남은 등 제거

12

17

 

 

1399

 좌명(佐命)

 태종 원년

 방간의 난 평정

9

3

12

23

1401

 정난(靖難)

 단종 원년

 김 종서, 및 안평대군 등 제거

12

11

20

 

1453

 좌익(左翼)

 세조 원년

 단종을 폐하고 세조 추대

7

12

25

 

1455

 적개(敵愾)

 세조 13년

 이 시애의란 평정

10

23

12

 

1467

 익대(翊戴)

 예종 즉위년

 남이, 강순, 치옥

5

11

24

 

1469

 좌리(佐理)

 성종 2년

 성종 추대

9

11

18

35

1471

 정국(靖國)

 중종 원년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 추대

8

13

30

54

1506

 정난(定難

 중종 2년

 이과의 치옥

5

5

12

 

1507

 위사(衛社)

 명종 즉위년

 운임, 유관, 유인숙, 등 제거

4

8

16

 

1546

 광국(光國)

 선조 23년

 종계변무

3

7

9

 

1590

 평난(平難)

 선조 23년

 정여립의 치옥

3

12

7

 

1604

 호성(扈聖)

 선조 37년

 임진왜란 때 선조 호종

2

31

53

 

1604

 선무(宣武)

 선조 37년

 임진왜란 때 무훈자(武勳者

3

5

10

 

1604

 청난(淸難)

 선조 37년

 이 몽학의 난 평정

1

2

2

 

1604

위성(衛聖)*

 광해군 5년

 임진왜란 중 광해군 수종

10

17

53

 

1613

익사(翼社)*

 광해군 5년

 임해군의 치옥

5

15

28

 

1613

정운(定運)*

 광해군 5년

 유 영경의 치옥

2

5

4

 

1613

형난(亨難)*

 광해군 5년

 김 직제의 치옥

2

12

10

 

1613

 정사(靖社)

 인조 원년

 인조 옹립, 광해군 폐위

10

15

28

 

1623

 진무(振武)

 인조 2년

 이괄의 난 평정

3

9

20

 

1624

 소무(昭武)

 인조 5년

 이 인거의 난 평정

1

2

3

 

1627

 영사(寧社)

 인조 6년

 유 효립, 정신의 치옥

1

5

6

 

1628

 영국(寧國)

 인조 22년

 심 기원,유탁의 난 평정

4

2

1

 

1644

 보사(保社)

 숙종 6년

 허견의 치옥 및 남인 제거

2

4

2

 

1680

부사(扶社)*

 경종 3년

 임인의 옥을 일으키며 노론제거

1

1

1

 

1724

 분무(奮武)

 영조 4년

 이 인, 정 희랑의 난 평정

1

7

7

 

1728

  

** 종계변무(宗系辨誣)란? 이조 개국 이래 1558년 (선조17년) 까지 이씨 왕조의 조상이 명나라 서적에 잘못 기재 된 것을 고치고자 주청하면,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는 이씨왕조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되어있어 누차에 걸쳐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명나라에서는 태조 실록을 정정 할 수 없다며 번번히 거절하였으나 선조 17년 5월에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사 황정욱 등 을 보내 그것을 고쳤으며 1587년 유 흥이 다시 사은사로 들어가 고쳐진 명나라의 대명회전을 가지고 돌아 올 때 왕이 친히 모화관으로 나아가 명의 칙사를 맞아들이고 사은사 유흥에게 가자(加資)하고 노비, 전토까지 주었다 왕은 친히 종묘에 가서 종계개정을 고하는 제사를 올리고 전국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 시호(諡號)란? 시호란 왕 또는 종친(宗親). 정 2품 이상의 문무관(후에는 정2품 이하에까지 확대), 국가에 공이 많은 신하들 학문이 뛰어나 존경을 받은 유학자(儒學者)들에게 그들이 죽은 뒤, 생전(生前)의 행적(行蹟)을 칭송하여 국가에서 추증(追贈)하는 이름을 말한다.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중국에서부터 시행된 듯 하며 요(堯)· 순(舜)·우(禹) 등도 시호로 해석된다. 그러나 시법(諡法)의 제도가 정해진 것은 주(周)나라 때인 듯 하며, 후에 진시황(秦始皇)의 명에 따라 일시 폐지하였다가 한(漢)나라 때에 다시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514년 (신라 법흥왕 1) 왕이 죽자, 지증왕(智證王)이라는 시호를 지어준 것을 시초로 하여 조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절차는,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자손, 지역 유림이 모여서, 선조(先祖)의 행실과 공적 등을 의논하여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예조에서는 봉상시(奉常寺: 국가의 제사나 시호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던 조선의 관청)를 거쳐 홍문관(弘文館)에 보내어, 봉상시정(奉常寺正: 정3품)과 홍문관의 응교(應敎: 정4품) 이상이 한자리에 모여 결정한다. 한편, 임금의 특별한 교시(敎示)가 있을 때는 자손들의 신청을 기다리지 않고 홍문관과 봉상시에서 직접 시호를 정했는데, 이는 퇴계(退溪) 이 황(李 滉)에게 문순(文純)이란 시호를 내려준 데서 비롯됐다.

시호를 정하는 법으로는 주공시법(周公諡法)·춘추시법(春秋諡法)에 따랐으며, 시호에 사용된 글자는 120여자에 달했다. 이는 글자마다 뜻이 들어 있어 생전의 행적에 알맞는 글자를 조합(組合)하여 만들고, 시호 아래 공(公)자를 붙여 부른다.

숭문주의(崇文主義)사회에서는 문(文)자가 최고의 영예였으며, 이외에도 정(貞)·공(恭)·양(襄)·정(靖)과 무관에게는 충(忠)·무(武)·의(義) 등이 자랑스러운 글자였다. 시호를 받는 다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표창으로 족보에는 물론, 묘비(墓碑)에도 기입되는데 그 중요성 때문에 글자문제로 시비(是非)와 논란(論難)이 많았으며, 뒷날 개시(改諡)를 요구하는 일도 많았다. 한편 김굉필<金宏弼: 문경공(文敬公)>·정여창<鄭汝昌: 문헌공(文獻公)>· 서경덕<徐敬德: 문강공(文康公)>·조광조<趙光祖: 문정공(文正公)>·김장생<金長生: 문원공(文元公)> 등은 정2품의 벼슬이 못되었어도 시호를 추증 받았다.

무인(武人)의 시호로 가장 영예스러운 충무공(忠武公)은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남 이(南 怡)·김시민(金時敏) 등 8명이나 있다. 또한 연산군(燕山君)이나 광해군(光海君)은 시호를 못 받은 임금들이다.

출처 : 육군3사관학교 충구회
글쓴이 : 김재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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