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스크랩] 오늘에 직면해 병자호란을 다시 떠올린다!

newgopjh75 2016. 12. 3. 11:30

 

오늘에 직면해 병자호란을 다시 떠올린다!

 

광화문 촛불 의미를 새기는 동시에 북 핵 등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숭고한 책무를 역사에서 찾아야 할 때가 바로 지금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한 겨울인 1637년 1월30일 조선 16대 임금 인조(1623. 3~1649. 5)는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 일대)에서 당시 야만 국으로 치부해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던 청 태조 앞에 나아갔다. 국가 대 국가 전란의 와중에 적장끼리 대하는 자리였지만 위치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 사람은 원정군이면서도 승전국의 승장(勝將)으로, 한 사람은 온 백성을 사지(死地)로 내몬 패군지장(敗軍之將)으로서 몰골이 말이 아닌 상태였다.


적장(敵將)끼리 마주한 지엄한 한 복판이었지만 인조임금의 복장은 왕의 상징인 곤룡포도, 군의 통수권자인 최고 사령관 전투복장도 아니었다. 머리는 상투가 벗겨져 산발한 채 흰색 무명 적삼을 걸쳐 입어 남한산성을 휘돌아 불어오는 강풍에 온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삼배구고두(三拜九臯頭)로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은 선혈이 낭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보위(寶位)에 올라 26년간 왕위에 재직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인조 임금은 개인으로서 죽어서도 선대 임금을 대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치욕이자 당시까지 조선역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일대 파란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정묘호란에 이어 불어 닥친 병자호란 대 사변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3학사를 비롯한 충신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백성과 여인네들이 정든 고향산천과 그리운 가족과 생이별을 고하며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포로가 돼 끌려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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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서호 부근에 위치한 삼전도비. 한자, 몽골어, 만주어로 작성돼 당시 삼국 언어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konas.net

 

 

 

 수신제가(修身齊家)하지 못한 통치권자, 국방을 도외시 한 국가의 군주, 흥청망청 여인들의 치마폭과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아첨에 농락당한 군주의 행태가 이어지거나, 권력 탐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反국가 부역(附逆)의 무리, 국가 최고지도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신하들의 무능과 이기가 이어질 때, 더하여 1592년 5월 임진왜란 발발 1년 전 왜(倭)의 침략 야욕 움직임을 현지에서 목격하고도 파당 간 이익을 우선삼아 임진왜란을 자초케 하고도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조선나라와 백성이 어떤 처절함으로 내몰렸던 가를 조선 중기 병자호란의 참혹함은 이들 전쟁을 통해 오늘의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으로 다가오게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을 둘러싼 현실과 시대적 상황은 엄혹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동력은 제 구실을 잃은 지 오래다. 항구를 떠난 배가 목적지를 향해 항해할 때, 크고 작은 파고와 풍랑의 위험은 늘 있게 마련이나 그럴 때 마다 조타실의 키(Key)를 쥔 유능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선장의 지휘아래 각기의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임무를 수행할 때 본인들은 물론 승객과 배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는 정 반대로 내몰렸을 경우 배는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어 일엽편주(一葉片舟) 신세로 전락해 선체를 집어삼키는 파도 더미에 부딪혀 결국 배는 침몰상태로 직면케 됨은 지난 역사와 사고사례 교훈을 통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쉽게 잊고 또 망각하고 만다

대한민국은 휴전선 비무장지대(DMZ)를 사이로 자유민주주 국가 대 북한 공산주의 집단과 70여년 분단국으로 대치중에 있다. 남한과 북한은 지난 과거 60여년 세월보다 김정은 집단에 의한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및 비무장지대 목함지뢰 도발로 촉발된 최근 10여년 사이 위협의 농도는 핵무기 실전배치 단계와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으로 어느 때보다 우리국가와 국민의 삶과 생존을 예측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 북한왕조에서 북 핵은 김일성의 유훈이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의 급사(急死)로 등장한 당시 28살 김정은은 집권 5년 기간 3차례(1차 : 2013. 2.12, 2차 : 2016. 1.9, 3차 : 2016. 9.9)에 걸쳐 핵실험을 가했다. 유엔의 전례없는 고강도 제재조치가 발효되고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나 지금 김정은에 있어 국제사회의 제재조치는 아무런 신경도, 위협도 안돼 보인다. 해외 외화벌이 일꾼들이나 고위직 외교관들이 현지를 탈출해 남한으로 줄을 잇고, 탈북자 3만명 시대가 열리고 세계 최악의 인권유린 국으로 그마저 지목되고 있지만 공포통치로 주민을 내몰며 오직 핵만이 자신과 그 체제를 유지시켜 주는 것인양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을 볼모로 삼고자 하고 있다.

 

▲ 새롭게 공사하고 있는 잠실역 환승 출입구. ⓒkonas.net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폭풍우에 방향을 잃은 조각배처럼 광야를 휘감는 냉기류처럼 우리를 둘러싼 주변국 흐름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갈수록 그 파고는 더 커지고 있음을 선명하게 체감케 하고 있다. 수도 서울의 심장인 광화문광장은 최순실이란 여인의 국정농단과 그 일파의 탐욕으로 대통령은 헌정사상 초유의 범죄 피의자가 돼 국민을 피로하게 하고 있다. 대통령을 향한 분노의 함성과 촛불이 불야성을 이룬 채 국가가 휘청이고 있다.

이런 때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분명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잠실 롯데호텔 인근 석촌호수 변에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가 전쟁에서 이긴 승전보와 청태종의 치적을 자세히 기록해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639년(인조17년)12월에 세운 비석이 있다. 삼전도비(三田渡碑)라 일컫는 ‘대청황제공덕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비(碑)는 한자와 몽골어, 만주어로 쓰여져 오늘날 세 나라의 언어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비석이 국가와 주민들에 의해 수난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비문의 굴욕적인 내용으로 인해 1895년 고종은 비를 땅속에 묻게 했으나 민족의 기(氣)를 꺾기 위한 일제는 1913년 다시 세웠고, 1956년 문교부는 다시 땅속에 묻었다. 하지만 1963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난 후 삼전동 일대에서 방치되다시피 하다 결국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허나 이후에도 주민들에 의해 스프레이 세례를 받는 등 훼손이 이어지다 현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지난 10월 어느 날 필자는 잠실 지하철 역 인근 송파 도로를 걷다 삼전도비 바로 가까운 곳으로 새롭게 지하철 환승 출입구 설치 공사가 이뤄지고 있음을 봤다. 이어 삼전도비로 다가서 안내문을 자세히 살피고 비석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어디 비석이 좋아서거나 개인적으로 사료적 가치에 관심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 새로 인도가 깔리고 도저들이 열심히 흙을 파고 운반하며 주변 조경공사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konas.net

 

 

 

 자랑스런 역사도 우리 역사고, 아프고 서러운,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사도 우리 역사라면 그를 통해 또 다시 내다볼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사실을 복기하고 준비하는 것이 더 큰 화(禍)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출입구 한켠에 삼전도비 안내문 하나라도 설치했으면 하는 바람이건만.

광화문을 밝히는 촛불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새기는 동시에 북 핵을 비롯한 우리를 둘러싼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숭고한 책무와 대한민국 주도 자유통일의 참 가치를 역사에서 찾아야 할 때가 바로 현재가 아닌가 생각게 된다.(konas)

 

출처 :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글쓴이 : 마이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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